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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중보자, 낮아지신 구주 | 정명훈 | 2026-01-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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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무엇을 믿는지 잊어버릴 때, 신앙은 습관이 되고 고백은 공허해집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전통은 늘 문답으로 신앙을 붙들었습니다. 질문하고, 대답하고, 다시 삶으로 확인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질문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누구인가?”그리고 “그분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소요리문답 21문과 22문은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육신을 아주 짧지만 깊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소요리문답 21문답을 보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며,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 문답은 단호합니다. “유일한 중보자”로 다른 길도, 다른 이름도 없다는 거시죠. 왜냐하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다시 잇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완전히 아시고 인간을 완전히 아시는 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위대한 교사도, 뛰어난 종교 지도자도 아닙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피곤함을 느끼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배고픔을 겪으신 참 사람이십니다. 이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한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는데, 이것이 기독교가 고백하는 신비이자 영광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를 돌아보면, 대개 이 고백이 흐려질 때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인간적으로만 이해하면 그분은 좋은 상담가 수준에 머물고, 너무 신적으로만 생각하면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수 있고, 그분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실 수 있는 중보자이십니다.”라고 말이죠. 이어지는 22문답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태어나심으로 사람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셨습니다.” 이 문답은 성육신의 방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천사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고, 성인의 모습으로 갑자기 등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기로 오셨습니다.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에서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 구원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되, 아담의 죄를 물려받지 않으신 죄 없으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 낮아지심은 우리 신앙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올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함께 내려가는 삶입니다. 더 인정받고, 더 높아지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복음의 열매입니다. 이 두 문답은 오늘 교회에 분명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중보자로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안전장치들—성공, 돈, 인간관계, 종교적 열심—에 기대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성육신의 길, 낮아지심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 교회가 세상 위에 군림하려 할 때, 복음의 능력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섬기고, 함께 아파하고, 가장 작은 자 곁에 설 때, 세상은 다시 복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동시에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 앞에서 다시 고백합시다. “주님, 주님만이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주님처럼 낮아지는 삶으로, 이 시대에 복음을 살게 하소서.” 짧은 문답이지만, 이 고백을 붙드는 교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개혁신앙의 힘이며, 오늘도 여전히 살아 있는 복음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잊지마시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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