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감하는 믿음의 공동체 | 정명훈 | 2024-07-27 | |||
|
|||||
|
지난 한 주간은 저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일년전에도 있었던 일들이 동시에 재발되었기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위경련으로 인하여 응급실을 또다시 다녀와야 했고, 돌아온 새벽 시간에 폭우가 내려서 또다시 집에 물난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응급실행은 지난 금요일 새벽, 토요일 밤 그리고 월요일 밤에 연이어서 위경련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감사하게도 주일예배는 정상적으로 지킬 수 있었지만, 이후 반복되어지는 상황에 저 자신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응급실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응급실에는 많은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었기에 도착 후 1시간 동안 대기하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었는데, 그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 때 욥기의 말씀을 가지고 나누고 있는데, 욥의 고통이 어떠했으며, 그리고 그 고통의 상황이 욥 자신의 죄때문이라고 나팔을 불고 있는 세 친구들과 논쟁해야 했던 욥의 그 상황이 조금이나마 몸소 느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혼자 아파서 죽겠다고 몸부림쳐도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그 시간은 나만 홀로 버려진 것만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의 순간이었습니다. 욥 역시 순식간에 재물과 자녀들을 잃고 자신의 몸까지 병으로 고통받는 상황에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매몰차게 몰아부칠 때 얼마나 외로웠을까?라는 생각이 강하게 몰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왔던 친구들이 칠일동안 말없이 함께 가슴 아파했던 짧은 위로의 시간이 지난후 급변하여 계속적으로 욥을 공격하는 형국을 맞닥뜨린 상황이, 제가 응급실에 도착해서 접수하고, 간호사, 레지던트, 담당의사에게 이어지는 과정속에서 몸은 아파서 말할 힘조차 없는데 계속되는 질문들로 인하여 너무나도 괴로웠던 순간과 오버랩 되면서 성경을 통해서 본 욥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몸소 느끼고 공감하는 시간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목회를 돌아보면서 회개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항상 공적인 예배와 소그룹 모임 등을 통해서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의 제목들을 나누며 그들을 품고 기도하고 사역해왔던 일련의 모습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말씀으로, 그리고 성도들의 문제와 아픔이 나의 문제와 아픔으로 여기면서 진정으로 함께 울고, 기뻐하는 공감이 이루어진 목회였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도들의 문제를 가지고 내 문제인것처럼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임에 내가 깨어지는 몸부림을 치지 못한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겉만 갖혀진 틀에 박히고 영혼없는 사역을 한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다른 길이 없는지 찾고 걱정했던 나 자신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함께 도전하고 싶습니다. 함께 공감하는 자리로 나아오도록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입술로만 부르지 말고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공감할 수 있는 아버지로 대하시지 않겠습니까? 한 아버지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형제, 자매들은 이심전심으로, 열손가락 찔러서 안아픈 손가락 없듯이 함께 공감하는 지체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율법의 대강령, 즉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있다.”(마 22:37-40)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과 이웃의 마음이 진정성있게 전달되는 공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넘쳐야 이웃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세워지고 그분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그 사랑으로 우리 형제,자매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감하는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감 없는 것은 결국 외면을 받고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교회 공동체는 공감 없이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머리되신 주님과 그분의 지체인 성도로 이루어진 교회가 어떻게 공감 없는 공동체로 유지될 수가 있겠습니까? 많고 적음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는 이제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공감과 성도들간의 공감이 풍성해지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