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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의 깊이와 은혜의 넓이 | 정명훈 | 2025-1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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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간이 왜 구원이 필요한가를 가장 분명하고도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설명하는데, 그중에서도 17문과 18문은 인간의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 타락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 두 문답은 인간 실존의 어둠을 직면하게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더 밝히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17 문답은 “사람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얻은 상태의 비참함은 무엇입니까? 모든 은혜의 교통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되었으며, 이 생의 모든 불행과 죽음 그 자체와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조금 부족해졌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천적으로 끊어진 상태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었지만, 타락 이후 인간은 영적 생명선을 잃어버린 채 스스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불안, 공허, 관계의 깨어짐, 끝없는 욕망, 죽음의 두려움도 결국 이 ‘단절의 현실’에서 흘러나온 결과들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사회 구조나 교육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교제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타락이 전적이었다면, 회복 또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8 문답에서는 “사람이 타락한 상태에서 처한 죄의 상태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타락함으로 전적으로 부패하여, 모든 선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하며, 모든 악에 대하여 전적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전적’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악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영역이 죄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지성, 감정, 의지, 양심, 심지어 인간의 종교성까지도 죄의 영향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선해질 수도, 스스로 구원을 갈망할 수도 없습니다. 죄의 영향은 단순한 ‘행동의 문제’를 넘어서 존재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선을 보고도 싫어하며, 악을 보며 자연스러워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도망가며, 진리를 알면서도 외면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그렇기에 전적 타락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게 됩니다. 반면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소요리문답은 인간의 상태를 날카롭게 비판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부요한지를 드러내기 위해이 진단을 내놓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먼저’ 이해해야 할 사실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찾아온 사람들이다.” 전적 타락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죽음의 그림자를 지나가는 우리를 붙들어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타락의 깊이는 결국 은혜의 넓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상태가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선택지’가 아니라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타락을 인정하는 것이 은혜의 출발입니다. 나는 괜찮다는 마음, 나는 선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은혜가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회개는 자존감의 파괴가 아니라, 은혜의 문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이유는 내가 똑똑하거나 도덕적이거나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전적 타락의 인간이지만, 전적인 은혜가 임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가정도, 관계도, 삶도 회복됩니다. 복음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새 창조의 능력’입니다. 소요리문답 17·18문답은 인간의 실존을 직시하도록 이끕니다. 그러나 그 어두움 속에서 우리는 더 분명하게 복음의 빛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변화되는 이유는 인간의 의지나 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의 역사 때문입니다. 타락의 깊이를 깨달을수록 은혜는 더 달콤해지고, 죄의 비참함을 이해할수록 구원의 기쁨은 더 커집니다. 오늘도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가 삶의 모든 자리에서 충만히 흘러넘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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